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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 jamie

 

한때 아이돌의 길을 걸을 뻔한 적도 있지만, 이즈미 이오리는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고교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이돌을 동경해온 형이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면서 오히려 자신의 모습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자, 그 다음 날 덜컥 교환학생을 신청해버린 것이다. 늘 서늘하고 날카로운 이즈미 이오리 답지 않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어쩌면 그저 어쩔 줄을 몰랐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의 생활비만을 들고 번잡한 도심의 고등학교로 오게 된 그는 운이 좋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문구류가 가득한 스텐셔너리 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었다. 리틀 도쿄라 불리는 재미일본사회의 거리에서 꽤 유명한 쇼핑 스팟이었다. 

이즈미 이오리는 이곳에서 매일 아침 새로 들어오는 일본 잡지와 펜촉, 그리고 잉크들을 정리했고, 가끔은 손님들의 여러 가지 고민에 조언을 주기도 했다. 자신을 무려 완벽한 고교생이라 부르는 만큼 그에겐 지루할 정도로 손쉬운 작업이었다. 그렇게 별일이라 할 것도 없는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처음으로 야간 클로징을 맡게 된 날이었다. 

쌓인 영수증을 차곡차곡 모아 정리하던 그가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야에 갑작스레 강렬한 색채가 나타나자, 그의 두 눈이 바로 데인 듯이 깜박거렸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저것은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한 이곳에서도 인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색. 속단할 수는 없지만, 자신과 같은 또래의 동양인 소년으로 보였다. 

이즈미 이오리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가게 문고리를 잡았다. 도로 바로 옆의 인도를 걷는 소년은 어느새 길가의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렸지만, 도무지 뭐라고 소리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턱 막히는 목청과 함께 그는 휑한 인도로부터 돌아섰다. 조금 찜찜한 마음이 불순물을 남기며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한 조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즈미 이오리의 완벽한 회계 능력에 감탄 받은 점장이 그에게 신경 쓸 일이 많은 클로징을 모조리 밀어준 것이다. 이즈미 이오리는 약간의 보수를 약속받고 시월 내내 이어질 야간 업무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날씨가 겨울 동짓날에 부쩍 가까워졌을 무렵, 그들의 만남은 계속되게 되었다. 그는 밤이면 어느 순간 거리를 헤매다, 자신이 부리나케 달려나가면 또 어느 순간 사라져있는 붉은 머리의 소년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즈미 이오리가 저녁을 넘어 한낮, 한낮을 넘어 새벽의 첫 순간부터 그 소년을 생각하게 되었을 때, 평소와는 다른 일이 생겨났다.

그가 소년을 발견하자 소년 또한 그를 발견한 것이다. 상상보다도 훨씬 깊은 색깔의 눈동자가 일순 불티가 튀는 것처럼 생기를 되찾았다. 어쩌면 그 위에서 깜박거리는 가로등의 불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매일 밤 뭘 하고 있나요.” 

“……어라.” 

 

붉은 머리 소년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럴 때마다 가로등 불빛이 포근한 뭉텅이가 되어 그 속에 하나둘씩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제 그의 눈동자는 방금 불빛이 밝혀진 촛불처럼 온난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즈미 이오리는 저도 모르게 그 모든 과정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방금 맞닥뜨린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인생에 늘 가득했던 서늘하고 날카로운, 모든 이성적인 영역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 시선에 붉은 머리의 소년이 잠시 멈칫하다 생긋 웃었다.

 

“안녕? 밤이 춥네! 너는 누구야?” 

“저는 이즈미 이오리라고 합니다. 저 문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추운 겨울밤에 매일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나? 나는…. 글쎄. 방금까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약속장소를 잊어버렸나? 내가 요즘 자주 깜빡깜빡하거든.” 

“…못 말리는 사람이었군요.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이즈미 이오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덧붙인 말에, 소년은 또 잠시 멈칫하더니 생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나세 리쿠야.” 

 

* * *

 

나나세 리쿠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이고 문구점 앞을 지나쳤다. 이즈미 이오리가 불현듯 그를 발견하고 빨리 뛰쳐나가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같은 모퉁이를 돌아 나갔을 것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붙들린 그들은 매일 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즈미 이오리가 준비한 핫밀크를 같이 나눠마실 만큼의 시간을 보냈다. 

“이오리. 이건 뭐야?” 

“그건 이번 할로윈을 맞아서 준비한 장식품입니다. 저희 문구점에서도 여러 가지 상품들을 들여왔거든요.”

나나세 리쿠는 문구점 사장이 담장에 즐비하게 매달아 놓은 해골, 호박, 거미, 마녀 모자와 리본 따위의 장식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밤바람에 그것들이 단체로 중력을 잊은 듯 붕 뜨며 휘날리자, 유쾌한지 발을 구르며 해맑게 웃는다.

이즈미 이오리는 그 모습을 자신 몫의 머그컵을 꾹 잡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미스테리어스한 소년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 이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그렇게 물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기억해 내셨습니까?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글쎄? 또 잊어버렸나 봐.”

“당신….” 

“그나저나 이오리, 할로윈이란 건 원래 이런 거야? 이 거미 인형은 좀 귀엽네!” 

 

말을 돌리긴. 그리고 전혀 귀엽지 않습니다. 속으로 툴툴거린 이오리가 컵 손잡이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할로윈은, 가톨릭에서 전파되어 온 축일이 따로 없는 성인들의 축일이기도 하고, 멕시코에서 말하는 망자의 날의 전야제이기도 합니다.”

“뭔가 신성한 날인 것 같네.”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면 그 어떤 날보다 세속적이게 된 오늘날의 할로윈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군요. 성인을 기리고 망자를 맞이하는 날이라면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의미 없이 거리를 꾸미고 싸구려 물건을 팔아버리니까요.” 

“이오리는 가끔 냉소적일 때가 있구나!” 

 

나나세 리쿠가 눈까지 접어가며 활짝 웃었다. 이럴 때의 그는 특히 부드럽고 안온해 보였다. 이즈미 이오리의 손안에 들어있는 핫밀크처럼.

 

“거리를 봐. 어떤 사람들은 물건을 파는 목적으로 할로윈을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은 추억을 위해서 집을 꾸미고 사탕을 나눠주고 있잖아. 성인을 위한 축일이든 망자를 위한 기일이든, 저렇게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지지 않아?”

“당신은 정말 대책 없을 정도로 낙천적일 때가 있군요.”

“그래?”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즈미 이오리는 평소 독설가에 능변가인 자신의 입이 그대로 다물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로 판단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말하길 주저한 것이다. 정말이지 어째서인지 나나세 리쿠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사람들은 할로윈에 귀신을 부른다. 스스로 귀신이 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일종의 모험처럼 각종 컬트와 소환의식이 난무하다. 사탕을 달라며 집 문을 두드리고는 순식간에 강도가 되어 범죄를 일으키는 사람들. 사탕 대신 마약이나 독을 나눠주는 정신이상자들. 그러면서도 이 반항적이고 무서운 분위기를 그저 여흥이라며 매년 되풀이하고 중독되어가는 사람들. 

그러나. 나나세 리쿠의 말처럼, 그 모든 악의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면 그 하루의 시간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응당한 유년의 추억이자 가족과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이즈미 이오리가 입을 다물자 나나세 리쿠는 허밍을 흥얼거렸다. 할로윈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딘지 마음이 따듯해지는 소리였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즈미 이오리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핫밀크가 들었던 컵만이 남겨져 있었다. 

 

시월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어느 날이었다. 

 

* * *

 

“이즈미 군. 요새 매출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다음날 아침, 문구점의 점장이 웬일로 그에게 먼저 다가와 매출의 현황을 물었다. 이즈미 이오리는 마치 준비된 응시자처럼 영수증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점장님. 기록적인 수치네요.”

“그렇지? 미국인들은 할로윈에 진심이라니까.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할로윈 때가 제일 대목이야.”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이젠 어느새 가게 매출의 관리자가 된 이즈미 이오리가 숫자를 써내려가며 생각했다. 그 옆에서 시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이던 점장이 커피를 내리며 한담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즈미 군. 클로징에는 좀 익숙해졌어? 요새 좀 맡겨버리기만 해서 미안한데.”

“괜찮습니다.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래도 늦은 시간에 귀가할 때는 조심해. 요즘 미국 치안이 전체적으로 안 좋잖아. 총기규제니, 마약류니, 시위니 하면서 말이야. 뭐 그거야 전 세계 어디든 똑같겠지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괜찮습니다.” 

“그래? 집에 갈 때는 우버를 타고 가던가? 도로 상황에는 늘 조심해. 요즘 주변에서 또 유명한 스트릿 레이싱 영화 속편을 찍는다고 다시 이 주변 불법 레이서들이 기승이잖아. 얼마 전에는 환자를 싣고 가던 엠뷸런스가 불법 레이서랑 충돌해서 인명 피해가 났대.” 

“…그렇습니까?” 

 

이즈미 이오리가 고개를 들었다.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던 점장이 싱글벙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세상 참,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니까.” 

 

* * *

 

“시간 참 빠르네요. 내일이 바로 할로윈입니다.”

 

이즈미 이오리의 나직한 혼잣말에 나나세 리쿠가 해사하게 웃었다. 평소와 달리 꿀이 잔뜩 들어간 핫밀크가 따듯하고 달콤해서였다. 

 

“와, 드디어?”

“…당신. 할로윈을 기다렸습니까?”

“사람들의 기대감이 잔뜩 느껴지거든. 대체 얼마나 즐거운 축일이길래 그러는 걸까?”

하나도 즐겁지 않습니다.

 

“꽤 즐거울 겁니다. …그러니… 같이.”

 

이즈미 이오리의 컵이 불현듯 꼭 붙들렸다.

“같이, 구경을 가시겠습니까?”

“응?? 이오리랑, 같이?”

“싫으십니까?”

 

나나세 리쿠의 커다란 눈이 토끼처럼 깜박였다. 

사실, 이즈미 이오리는 누구보다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토끼도 그렇고, 그의 큰 눈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사실 토끼의 빨간 눈이 그 밑의 살아있는 피를 비추는 것이라 알았을 때만큼 씁쓸했다. 붉고 아름다운 것에는 늘 그만큼의 이유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좋아! 이오리랑 같이 놀러 갈래.” 

 

나나세 리쿠가 밝게 웃었다. 더는 핫밀크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묘하게 뛰는 심장박동에, 이즈미 이오리는 울 듯 우는, 웃는 듯 우는 표정이 되었다. 

더 이상 자신이 정의하고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혼연하게 섞여들어 가는 기분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세상에 익히 없던 일이지만, 점장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는 한다. 

 

그렇게 할로윈이 되었다. 

 

* * *

 

할로윈 당일은 리틀도쿄뿐만 아니라 온 거리가 다 떠들썩했다. 이즈미 이오리는 학교에서부터 온갖 기괴한 분장을 한 동급생들에게 한껏 시달려야만 했다.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나는 피 칠갑을 하고 온 흡혈귀. 복도에서 긴 빗자루를 휘둘러 민폐가 된 마녀. 덥지도 않은지 온갖 퍼를 붙이고 나온 늑대인간. 심지어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머리에 못을 박은 녹색 프랑켄슈타인 선생님의 등장에 그는 겨우 질린 표정을 참았다.

하지만 끝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분장을 한 사람도, 분장하지 않은 사람도, 할로윈을 좋아하는 사람도, 할로윈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가 어딘가에서 꼭 웃고 있었다. 그러자 나나세 리쿠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그저 웃고 싶어하며, 기대하고 싶어하고, 추억을 만들고 싶어할 뿐이라는 것을. 

그 말을 하던 소년의 표정을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강하게 쥐어짜이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또다시, 그때 그 순간만큼 어찌할 줄 모르는 기분이 되어버린다. 그때는 이곳으로, 먼 타지로 도망쳐 왔다. 그러나 지금은 또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밤, 할로윈이 종착역으로 향한다.

 

이즈미 이오리는 처음으로 기도란 것을 했다. 

 

* * *

 

“이오리! 이쪽이야!” 

“당신.” 

어둑한 밤이 수놓아진 배경에서 나나세 리쿠가 먼저 이즈미 이오리를 불렀다. 아마 처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를 먼저 발견하고, 이름을 불러준 것은. 

이즈미 이오리는 괜히 소매를 만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거리의 담벼락이 아닌 곳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할로윈 분장과 장식이 예쁘기로 소문난 주택가에서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잘 찾아오셨군요.” 

“이오리가 여기 있다고 들었거든.”

“…가시죠.” 

나나세 리쿠는 항상 그랬듯 웃는 얼굴이었다. 이즈미 이오리 또한 표정을 풀고 고개를 돌려 집집의 장식을 눈에 담았다. 점점 축제에 참가하는 것처럼 들뜬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틴에이저들의 분장보다 한층 더 코어한 피칠갑 분장이 난무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말처럼.

 

“다들, 웃고 있군요….”

“오늘은 즐거운 날이니까. 그러니까, 이오리. 이오리도 마음 편히 웃어.”

“….”

 

그렇게 말한 나나세 리쿠가 시범을 보이듯이 해를 향해 피어나는 것처럼 웃었다. 이곳에 해 따윈 어디에도 없는데도. 아니…. 돌이켜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그와 함께 해 같은 것, 따듯하고 안온한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당신과 만나는 곳은 어디든지 축축하고 차가운, 외롭기만 한 담벼락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돌이켜보면, 당신이 바로 그런 것 그 자체였다. 

 

“이오리?”

“…아닙니다. 가죠.” 

 

그는 나나세 리쿠의 손을 잡고 걸었다. 

온 가족이 함께 떠들썩한 인파가 그들을 삼켜주었다. 어느 집에선 외벽에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공포영화를 틀고 있었고, 거대한 귀신 풍선과 마녀 목소리가 겔겔겔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또 어느 집에선 거리 전체에 하얀 솜으로 거미줄을 만들어 곳곳에 사탕을 늘어놓았고, 어린아이들이 서로 엉켜가며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또 어느 집에선 까만 부직포 아래에 보라색 조명을 틀고 그 안에 미로를 만들어놓았고, 또 어느 집에선 아예 마당에 자그마한 호러 하우스를 만들어놓았다. 수많은 사람이 그 체험을 위해 서로 옹기종기 모여 손을 잡고 서 있었다. 

나나세 리쿠는 그 모든 것들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가리키며 시종일관 웃었다. 이즈미 이오리 또한, 어느새 살짝 치켜 올라간 입매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느낄 틈조차 없는 사람처럼. 

 

“이오리! 저거 봐! 와! 저거 재밌어 보여!”

“호러 하우스 말입니까. 나름 세세하게 만들어 놓았네요.”

“이 냄새는 뭐지? 곳곳에서 시나몬이랑.. 달콤하고 맵고 쌉쌀한 냄새가 나.”

“카다멈이나 육각 같네요. 이 시기에는 실물 크기의 시나몬 빗자루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 언젠가 그거 가지고 마녀 분장을 해보고 싶네! 사실 이오리, 나 날 수 있거든.” 

 

이즈미 이오리는 웃었다. 나나세 리쿠가 즐거워 보였다. 

 

“이오리, 이오리! 우리 저거 해보자! 사탕 받고 싶어!” 

 

그는 나나세 리쿠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다트 놀이를 하고, 까만 갤럭시처럼 꾸며놓은 끈적한 풀을 건너가는 놀이도 했다. 복불복으로 펀치가 튀어나오는 상자도 골라보고, 마법사 영화의 온갖 맛이 나는 젤리도 먹어보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이즈미 이오리에게도 최초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저 단조롭고 지루하고 조심스러웠던 일본에서의 시간과, 이 시간, 이 공간, 이 사람과 겪은 모든 일은 궤를 달리했다. 모든 것이 방금 태어난 것 같이 새로웠다.

 

“이오리!” 

 

저렇게 환하게 앞장서서 걷는, 저 사람을 보면. 

 

“아, 이오리. 곧 12시가 되어가네.” 

 

나나세 리쿠가 이오리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아쉬운 듯 말했다. 이즈미 이오리가 그대로 잠긴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그렇네요. 아쉽지만 끝이 오나 보군요.”

“응? 할로윈 장식은 12시까지야?”

“그런 건 아닙니다. 축제는 밤이 샐 때까지, 어쩌면 내일까지도 계속되겠죠.” 

 

하지만 당신은 아닐 테니까. 이즈미 이오리의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나세 리쿠가 일순 생긋 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웃음이 이때까지의 그 어느 것 중에서도 가장 홀가분해 보였다. 

 

“이오리.”

“네.”

“이오리는, 왜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

“…예?”

 

이런 순간조차, 당신은.

 

“한 번만 불러줘!”

“…싫습니다.”

“왜?”

“당신은 이제 가야 할 테니까.” 

 

이즈미 이오리가 숨을 죽인 채 까끌한 목소리를 냈다. 

감히 소리를 높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숨통을 조이듯 괴롭게 억눌러지는… 알 수 없는 감정투성이였다.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낀 나나세 리쿠가 일순 눈매를 내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늘 미소 짓고 있었지만, 이번의 미소는 그 외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녹여서 담아내는 듯했다. 

 

“이오리. 알고 있었구나….” 

“조금의 눈치만 있어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이오리는 똑똑하니까.” 

 

나나세 리쿠가 주택가의 끄트머리에 다다라 사람들이 한적해진 분수대에 올라섰다. 마치 중력을 모르듯 가벼운 곡선을 그리며. 달빛을 배경으로 장난스레 걷는 그의 등이 살짝 투명해진 듯도 했다. 아니, 어쩌면 달빛이 어울리는 사람이기에, 그저 빛이 제멋대로 머물러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똑똑해서, 나도 모르게 나를 알아보고 불러줬잖아.”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사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많지 않아.”

그 뒤로, 나나세 리쿠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쌍둥이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집안의 가계가 악화하자 쌍둥이 형이 가족을 떠나 엔터 관계자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 이후 혼자 외롭게 자라난 그는 쌍둥이 형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해서 미국에 왔지만, 오래된 지병이 악화하여 응급병원으로 실려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 

“…역시.”

 

나나세 리쿠는 점장이 이야기해주었던 그 교통사고의 피해자일 것이다. 이즈미 이오리가 무척 복잡한 표정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자, 나나세 리쿠가 눈썹을 한껏 내려뜨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보지 마. 특별히 후회는 없어. 어렸을 때부터 워낙 몸이 약해서, 이런 상황을 많이 생각해보기도 했고.”

그렇다고 무섭지 않았던 것은 아닐 텐데.

 

“그냥, 아직 못해본 것도 있고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조금 외롭네~ 하고 생각했을 뿐인데.” 

 

당신이라고 늘 웃거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아마 바로 천사님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기서 미적대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근데 어느 날부턴가 누가 자꾸 날 부르는 게 느껴지더니, 이오리가 딱! 하고 보이는 거야.” 

 

그가 나나세 리쿠의 뒷모습을 계속해서 쫓아갔던 그 밤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즈미 이오리가 견디지 못하고 조금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때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무언가 더 나았을까요?”

“그럴 리가. 이오리 덕분에 해보지 못했던 경험도 많이 하고, 많이 웃었어. 고마워, 이오리.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어줘서. 이젠 가야만 하겠지만.” 

시계의 시침이 어느새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멀어져 있을 뿐이다.

 

“어쩐지 예감이 들거든. 곧 망자의 날이잖아. 망자의 날에는, 죽은 자가 와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간다 하지. 나는 이오리를 만나고 ‘돌아가는’ 셈이야.” 

“…그런 건 그저 풍속에 지나지 않아요. 어쩌면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어. 당신이 바란다면, 여기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이오리. 그런 고집은 부리면 안 돼. 천사님이 기뻐하지 않을 거야.”

 

인간의 바람은 유한하다. 어떻게 발버둥쳐도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즈미 이오리가 피가 나도록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쎄? 아무것도. 이오리, 이오리는 사람들이 할로윈에 귀신을 부르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잖아. 그걸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나나세 리쿠가 정말 안심이라는 것처럼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제는 그 손가락조차 조금 희고 투명해 보였다. 이즈미 이오리는 알싸한 통증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이때껏 그렇게 의식조차 못 해보았던 깊숙한 공간이었다. 

 

“아무래도 나, 귀신인 것 같으니까. 이오리에게 너무 슬픈 기억을 주고 싶지는 않아.”

 

나나세 리쿠가 희게 웃었다. 

 

“미안해, 이오리. 이미 울려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저는 울지 않습니다.” 

“응, 그래. …어라, 어떡하지. 조금 졸려오는 것 같기도 해.” 

 

시침이 12시로부터 아주 조금 빗겨가 있다. 아주 조금. 

 

“남기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전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텐니에게. 많이 보고 싶었다고 전해줘…. 그리고 많이 원망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많이 좋아해서 그랬다고. 지금도, 아직도, 정말로 많이 좋아한다고.” 

 

나나세 리쿠는 이제 거의 잠투정을 하는 것 같았다. 정말로 날 수 있었던 것인지, 온몸이 달빛 사이로 붕 떠있다. 아마 이제 그를 볼 수 있는 것은 이즈미 이오리가 유일할 것이다. 아니, 아마 어쩌면 정말 처음부터, 이즈미 이오리 뿐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나세 리쿠가 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정말로 좋아한다고.”

“…네. 꼭 전하겠습니다.”

“고마워, 이오리. 마지막에 이오리와 만나서 다행이었어. 그래도 앞으로는 길거리의 귀신에게 함부로 말 걸거나 그러지 마…. 나는 착한 귀신이어서 이오리가 멀쩡했던 거야.”

목소리가 멀어진다. 이오리는 뜨겁게 얼굴을 가로지르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당신이 당신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오리?”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당신 같은 귀신은 둘도 없을 테니, 말을 걸 일도 알아볼 일도 없을 겁니다.”

붉은 색이 생각날 것이다. 살아있는 피가 비치는 토끼의 눈을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경이롭고 아름다운 생명의 색에 압도되어서.

 

“그래…? 그럼 다행이야. 이오리, 나 정말 졸려.” 

“안녕히 주무십시오.” 

“응. 텐니……….”

 

……….

 

“나나세 씨.”

“…나나세 씨?”

 

“……나나세 씨…….”

 

……….

 

달빛은 방금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잊은 듯이 무정히도 흩어져 버렸다. 이즈미 이오리는 눈부신 물방울이 튀기는 분수대 앞에 홀로 서서,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멍했다. 아주 짧은 무언가가 끝나버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감하기에는 머리가 정말로 너무 멍했고, 마음이 비어서, 그리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정말로 생각나지 않아서…. 그저 텅 빈 상실감과 공허함, 말로 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고 괴로운 무언가에 꽉 잠겨 도무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같은 자리에서 망자의 날을 맞았고, 새벽 같은 하늘이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망자들을 보내는 하얀 리본들이 그를 배웅하듯 흔들렸다.  

 

 

* * *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이 보고 싶었다고. 원망도 했지만, 사실은 좋아해서 그랬던 거라고. 그리고 지금도… 많이 좋아하고 있다고.” 

 

현대의 천사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소년이 그의 앞에서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다. 그는 쌍둥이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전해 듣고 뒤늦게 온 길거리를 헤매던 중이라고 했다. 이즈미 이오리는 나나세 리쿠가 생전 짧게 사귀었던 친구로 분하여 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에야 정말로 전할 수 있었던 말을 전했다. 

 

“그는 당신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리쿠…….”

아마 그는 남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종류의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무너지는 억장 앞에서 그 또한 인간이었다. 유한한 인간. 

그는 잠시 손바닥을 들어 올리더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뚝뚝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이즈미 이오리는 두말없이 그에게 허리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기나긴 흐느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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